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양제(수)|수양제]]의 야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수양제어진.jpg|width=100%]]}}}|| || '''[[양제(수)|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 패전에 큰 충격을 받은 문제는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을 일체 중단시켰다. 고구려에 대한 대우를 전쟁 이전에 하듯이 했고,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영양왕]]도 해마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삼국사기]]》에서는 600년 1월 한 해밖에 확인이 되지 않는다.] [[문제(수)|수문제]]는 아들 [[양제(수)|수양제]]와 달리 [[대운하]] 공사도 백성들이 힘들다고 하자 필요한 건 알지만 중단하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세율을 낮추며, 평시 근검절약한 보기 드문 [[성군]]이었다. [[전쟁]]은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는 데 실패해서 피만 본지라 나중에 또 공격할 생각이었을지 몰라도 한동안은 지출로 소모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기르는 데 신경쓴 것 같다. 또한 얼마후인 602년에 베트남 원정을 단행했는데 전 리 왕조 제2대 국왕인 리펏뜨를 붙잡아 참수형에 처함으로써 베트남을 다시금 중국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며,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로 인한 후폭풍을 그럭저럭 수습할 수 있었다.[* 다만 이때 베트남을 정복한 김에 [[참파]]도 같이 침공하면서, 참파군을 격퇴했지만 수나라군이 수나라로 되돌아오는 도중에 풍토병으로 대거 사망하면서 참파 원정은 별 실익이 없었다.] 그러나 604년에 [[수나라]]에서 크나큰 변고가 일어나게 된다. [[명군]] [[문제(수)|수 문제]]가 사망하고, 모략으로 형을 몰아내고 태자가 된 [[양제(수)|양광]]이[* 양광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수서》 자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갖은 위선과 모략으로 형의 자리를 뺏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뒤를 이어 새로운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양제(수)|수 양제]]다. 아버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허영심이 참으로 남달랐던 수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수했고, [[대운하]]를 다시 건설한다.[* 사실 [[대운하]]는 [[문제(수)|문제]] 시절부터 시작됐지만, 워낙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할까 염려한 수 문제가 공사를 중단시켰지만 수 양제는 '''[[공밀레|백성이 공사로 힘들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냐 식으로 공사를 재개해서 스케일이 커진 거다]]'''. 그리고 수 양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딱 대운하만 만든 게 아니고 별궁이나 가로수 등 쓸데없는 짓을 많이 병행했다.] 그리고 주변국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활동이 시작된다.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이렇게 정복 사업에 성공한 양제가 선황 시절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고구려를 그냥 놔둘 리 만무하였다. * 수나라의 국력은 아버지 문제의 노력으로 아주 막강했는데, 애초에 [[양제(수)|수 양제]]가 그렇게 해처먹을 수 있었던 것도 나라의 저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태종(당)|당태종]] 시기나 심지어 [[고종(당)|당고종]](唐高宗)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나라는 '''수나라 최전성기 시절의 호구 수를 뛰어넘지 못했다'''[* 허청웨이가 쓴 《중국을 말하다》에 따르면 당시 수나라 인구는 약 4,600만 명으로 집계된다.]. 역으로 말하면 수 양제는 그렇게 수 문제가 고생하면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수나라를 나락에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일례로 수나라는 대규모의 중기병을 운용해 기병 전력의 중심이었지만 당나라는 그럴 만한 경제력이 없어서 중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하지 못하고 크게 축소하여 경기병을 기병 전력의 중심으로 해야 했다. 물론 원흉은 수 양제.] 결국 수 문제 시절을 따라잡은 건 몇 세대 뒤인 [[현종(당)|당현종]] 초기였다. 한편 고구려는 양광의 과시욕과 통일된 [[초강대국]]이 출현하자 극도로 긴장했다.[* 아무리 [[고구려]]가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통일 중국의 위험성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양광의 정복 사업이 한창 성과를 보일 때,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동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모두 친히 입조해 공물을 바쳤다. 사치와 허세를 좋아하는 수 양제는 영양왕에게도 입조(入朝)하라고 말했지만, 영양왕은 두려움을 느껴 《수서》의 표현대로라면 '''번국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 쉽게 말하면 "오라고 했는데 영양왕이 안 왔다. 그리고 제대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수 양제 입장에서 불경하게 입조를 거절한 것도 모자라 전쟁 대비에 착수하기까지 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동돌궐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607년에 사신을 보내 동돌궐의 계민가한을 만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수 양제가 계민가한을 직접 만나러 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계민가한은 고창국과 함께 수나라 조정에 입조를 했던 적이 있었고, 수나라의 국력을 몹시 두려워했기에 차마 숨길 수가 없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수 양제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수나라)|배구]](裵矩)가 수 양제에게 이렇게 간언한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중국)|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전한|한]](漢)·[[진(통일왕조)|진]](晉) 때 모두 [[한사군|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선황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고구려의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이에 양제는 우홍(牛弘)을 통해 고구려 사신에게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든 까닭에 친히 그 장막에 왔소. 내년에는 마땅히 [[베이징시|탁군]](涿郡)으로 갈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의 왕에게 마땅히 빠른 시일 내에 들어와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시오. 보존과 양육하는 예절은 마땅히 계민(啓民)과 같이 할 것이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그대들의 땅을 돌아볼 것이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이것은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